[인류의 미술 Chapter I.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29) BC. 156 페르가몬 대제단 (Pergamon Altar)
[인류의 미술 Chapter I.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29) BC. 156 페르가몬 대제단 (Pergamon Altar)
  • 조명계 용인대 교수
  • 승인 2019.11.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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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제단의 서쪽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페르가몬 제단의 서쪽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터키 이즈미르 주의 베르가마(Bergama)에 소재하던 페르가몬(Pergamon)왕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인 리시마코스(Lysimachus) 장군의 부관 출신인 필레타이로스(Philetaerus)가 BC 5세기경 세운 왕국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훗날 황제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따라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는데 로마는 바로 이곳을 소아시아라 이름 짓고 속주로 삼았다. 이후 페르가몬은 지속 번영하여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역사상 페르가몬이 유명한 곳으로 남은 이유중 하나로 양피지 기술을 든다. 중국의 채륜에 의해 종이제조기술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이 양피지제조기술이 유일한 기록매체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양피지 parchment라는 말의 어원도 Pergamun에서 유래했다. 

페르가몬이 개발한 양피지 제조법은 양, 염소, 소가죽을 석회수에 열흘간 담근 후 표면의 털을 제거하고 다시 표면을 수차례 무두질하여 만들었다. 

또 다른 알렉산더 대왕의 치적으로 평가되는 바는 지역마다의 도서관 설립인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훌륭한 도서관이 이곳에 세워졌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바로 이 페르가몬의 도서관에서 장서 20만권을 클레오파트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다. (선물 치곤 너무 과하다. 선물이 과하면 작업이 안되는 법인데..) 안타깝게도 이들 장서들은 이집트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페르가몬은 1878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발굴과정에서 제우스 제단, 아테네와 디오니소스 신전, 트라야누스 신전, 왕궁, 도서관, 극장, 병영, 아고라 등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역에서 아스클레피온이라는 고대의 종합병원 터도 발굴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은 1910-1930년 사이 완공되었는데 페르가몬의 대표적인 축조물로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제단을 비롯하여 밀레토스 시장의 문, 이슈타르 문 등 위대한 건축물들이 그대로 옮겨지고 실물 크기로 재 축조되어 오늘날 전시되고 있다. 

이 축조물에는 헬레니즘 미술의 걸작품으로서 거인들과 신들의 전쟁을 묘사한 소벽(Frieze)들로 구성되어 있다. 페르가몬 대제단은 폭이 35.64미터이고 높이가 33.4미터이다. 앞 계단만 해도 너비가 거의 20미터이다. 

영국과 프랑스만이 아니고 독일까지도 점령지의 유적이란 유적은 전부 떼어 베를린으로 가져 갔으므로 오늘날 정작 베르가마에는 남아있는 유적이 하나도 없다.

아테나와 니케가 땅에서 솟아오른 알키오네스, 가이아와 싸우는 모습
아테나와 니케가 땅에서 솟아오른 알키오네우스, 가이아와 싸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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