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미술 Chapter I.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40) 비잔티움 Byzantium 역사의 진실
[인류의 미술 Chapter I.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40) 비잔티움 Byzantium 역사의 진실
  • 조명계 용인대 교수
  • 승인 2020.02.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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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zantium Empire em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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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의 역사 이야기를 쓴다. 먼저 서구 역사에서 비잔티움의 화려함과 문화의 깊이, 지식의 정도 등이 철저하게 서구에 의해 가려져 왔음을 말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고 각자도생의 길을 갈 때 동로마는 발흥해 갔다. 그것도 1100년간이나... 전주에 올린 라벤나 모자이크 외에 로마법 등 로마제국을 계승한 사실 등 일체의 비잔티움 역사는 서구 역사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해 왔다. 마치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에 의해 무시당하는 것과 동일하게. 역사란 힘있는 자의 손에 의해 수정되기도 하는 것이므로... 

비잔티움은 바로 동로마제국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서구의 옛 대 학자들 몽테스키외 등을 비롯하여 현존하는 역사학자들까지도 비잔티움의 역사를 지우다 못해 부정적인 요소들만 부각시켜 비잔티움을 음의 제국으로만 치부해 버렸다. 

사실 비잔티움의 정체성은 로마제국의 법치주의와 군대편제를 이어 받았으며 언어는 가까운 그리스어를 차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이 너무나 커져 버려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했다. 

서로마는 게르만에게 정복당해 서로마 지역이 정체되어 가는 동안 동로마는 꾸준히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보존 발전시켰다. 앞서 언급한 수도교, 로마의 대중목용탕, 원형경기장 등을 똑같이 계승했다. 

로마법도 그제 언급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법 대전으로 다시 정리되었으며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325년 니케아 공의회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6세기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초대형 건축물인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서로마 지역은 1000년 후에야 지을 수 있었다. 경제력의 차이가 커도 심히 컸다. 동로마제국의 국력은 넓게 퍼져 콘스탄티노플은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고 그 무역 대상지가 시칠리아섬과 북아프리카까지 이르렀다.

비잔티움은 사망후 장기기증까지 했고 그 혜택은 서로마 지역이 수혜받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함락된 후 로마로 피신한 동로마 난민들이 전해준 그리스 고전들은 동로마제국으로서는 안구를 기증한 것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지역을 도와준 동로마를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4차 십자군의 콘스타니노플 점령이었다. 세상에 믿을놈 정말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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